YALA Mission & TIU
2020년 5월 정기이사회 예배 말씀
본문은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거의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밀레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 들을 불러 이 땅에서의 마지막 고별사를 한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부른 것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면 그가 에베소를 방문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예루살렘 방문을 서둔 것은 ①전 세계에서 모여 오는 유대인들 에게 전도하기 위해서이며, ②각 지방에서 거둔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였으며, ③그의 이방 선교에 대한 선교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으며, ④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 선교를, 앞으로 착수할 것을 계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그의 고별사에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이별을 전제로 한 것 이어서 안타까움이 담겨 있으나, 보다 더 강렬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어떻게 그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자신의 안위나 심지어 생명에 연연치 않고 오히려, 그 생명을 딛고 일어서서 복음 전도사역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바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2020년 5월을 맞이하여 오늘은, 얄라 선교회와 틴데일 국제 대학교라는 이 시대적 막중한 사명을 이끌고 있는 여러분들과 함께 사도바울의 훌륭한 신앙과 선교정신에 대하여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그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선교 사명을 수행하였음
1) 성령에 사로잡혀 산 그의 삶
22절 말씀을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여기서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 함은 성령에 의하여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메섹 회심 사건 이후로 바울은 성령에 의하여 지배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성령께서 가라하시면 갔고 (행 13:4), 가지 말라 하시면 (행 16:6-7) 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의 예루살렘 방문도 성령에 의하여 환란당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역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루살렘에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하는 것도 자기의 말을 하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고전 2:13 ; 행 18:9). 그는 그의 삶을 갈2:20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의 삶은 그리스도에 의한 삶이었으며 성령에 의한 삶이었습니다.
2) 그는 환란도 성령의 뜻이라면 감수함
23절 말씀을 보면,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이 제1차, 제2차 선교 여행 때처럼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고자 한 것은 이미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지만 그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그의 운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의 가르쳐 주심으로 이미 알고 있었고 이는 실제로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으로 다시 경고되지만 (행 21:10-14), 그는 예루살렘 방문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무조건 이 지시에 순종함으로써 결국 그를 로마 선교사로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 하였느니라’ (히11:38).
2. 그는 충성을 다하여 선교 사명을 수행하였음
1) 경주자와 같은 열심으로 수행함
24절 말씀을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 증거의 사명, 즉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일을, 마치 운동선수가 경주장에서 달리는 열심을 가지고 했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말대로 모든 지식, 모든 시간, 모든 정열을 선교 사명을 위해 다 쏟고 쏟았습니다. 그는 복음 선교를 위하여 전력투구한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은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선교를 위해 달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2) 군사와 같은 책임감으로 수행함
바울은 복음 선교를 ‘선한 싸움'(딤후 4:7)이라 하고, 복음 전도자를 ‘그리스도예수의 좋은 군사'(딤후 2:3)라고 규정했습니다. 여러분, 선교 사역은 자신의 삶을 담보로, 투쟁하는 일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이 사회악과의 싸움이며, 지금의 교회들을 거의 잠식하고 있는 올바르지 않는 비 성경적 사상과 제도를 과감하게 지적하고 성도들에게 그러한 자들의 정체를 밝혀 줌으로 올바른 신앙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사탄과의 치열한 영적 싸움입니다. 군사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명령에는 복종이 있을 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정신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3. 그는 생명을 바쳐 선교 사명을 수행하였음
24절 말씀을 보면,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그의 생명을 잃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명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재단에 ‘관제와 같이'(딤후 4:6)부음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명은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 죽었고, 지금의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생명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복음 선교’를 고귀한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대가로 ‘의의 면류관'(딤후 4:8)까지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존귀한 가치가 있는 사역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 선교는 천사까지도 흠모하는 사역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벧전 1:12).
지금의 시대가 무서운 것은 총과 칼로 박해를 해서가 아닙니다. 적과 아군(신앙과 비 신앙)을 구분할 수 없는 피아식별이 불분명한 시대이기에 더욱 무섭고 우려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직분은 바람에 나뒹구는 휴지조각과 같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간절함이 사라지고, 초점을 잃고 내일의 소망을 상실한 삶을, 여전히 신앙생활이라 부르며 세속화된 인간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이란, 자신의 죄악을 신앙이라는 덮개로 덮고, 성경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스스로 위안하고 용서하며, 또 세상에 나아가 뻔뻔하게 마음껏 범죄 함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밝힐 때는 어김없이 자신이 크리스쳔임을 말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들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신앙의 거룩성은 오염되어,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딤후3:1-5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요즈음은 신앙생활도, 섬김도 자기의 마음에 들어야 실행을 하고,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냉정하게 돌아서 버립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의 기준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입니다.
이것은 분명, 신앙의 모양은 가졌으나, 신앙도 믿음도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회칠한 무덤’ (마23:27)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마7:22-23).
이와같은 현상은, 철저한 성경 중심의 신앙 교육, 교리 교육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잘 이해시키고 다독거리는 것이 중요하지 무슨 교리를 앞세우며, 옳다 아니라로 냉정하게 딱잘라 말하여 상대방을 언짢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불투명한 비 신앙적인 사고가 오늘의 교회와 신앙을 망쳐놨고 이러한 자들이 있는 한, 교회의 바른 회복과 신앙의 재건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자체가 교리서임을 잊지 맙시다.
주의 종들에게 부탁합니다. 행여나 출석교인이 줄어들까 염려하여 그들의 잘못된 행동들을 못 본채 하거나 묵과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성직을 맡 은자가 아니라, 노동은 하기 싫고, 남의 밑에서 일하기도 싫어, 기독교라는 이름과 성직자라는 감투를 쓰고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불쌍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았으니, 내가 무엇을 할 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눅16:3). 여러분의 페르소나(Persona)를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벗어 던지십시오. 그것이 당신이 사는 길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21). 신앙이란 예, 아니오. 이것만 존재하지 글쎄요는 존재치 않습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이고, 화와 복과, 생명과 저주의 이유입니다.
우리의 선교목적은, 바른 진리(교리)를 가르쳐서, 바르게 배운 주의 신실한 일꾼들을 파송하여,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참된 성도와 예배가 건설되기를 바라는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러한 신앙정신을
자신의 사역에도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주의 일꾼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 진리와는 타협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나태한 자리에서 속히 털고 일어나, 지금 내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내 신앙을 점검하며, 꺼져가고 있는 내 신앙의 불 ! 그 열정 ! 처음 사랑을 회복해서 다시 내 심령 속에서 세계 복음 선교의 용광로가 활활 타 오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시온이여 깰 지어다 깰 지어다 네 힘을 입을 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 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사52:1).
얄라 선교회와 틴데일 국제 대학은, 세계선교와 교회회복과 개인의 바른 신앙양육을 위하여 힘쓰고, 기도 합니다.